'서브 PC'라는 명분의 노인학대, 이제 끝났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놀랍지만 나는 최근까지 서브 PC로 '삼성 센스 P560'이라는 모델을 써 왔다. 어떻게 보면 '써 왔다'가 아니라 '굴려 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정도로, 2009년에 출시되었던 이 모델을 2022년 현재까지 현역으로 계속 쓴다는 것은 거의 '노인 학대'나 다름없는 행위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인텔 코어2 듀오' CPU를 내장하고 있는 이 모델은 의외로 GPU로는 CPU 내장 그래픽 대신 '엔비디아 지포스 9600M'을 따로 차용하고 있던 점이 조금 비범했던 모델이었다. 출시 당시 '전문가용 제품'이라는 콘셉트를 표방했기 때문인지 기본 사양에 은근 힘을 실어준 듯한 흔적이다.

 

'수능 끝난 고3' 시기의 무료함을 채워주곤 했던 P560

아무튼 이런 2009년산 노트북치고는 꽤 비범했던 사양을 베이스로 하여 여기에 SSD 드라이브의 가호까지 받아서 64비트 윈도우 10도 잘 감당하고 저사양 게임도 잘 돌리고 하는 등,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는 수준'으로 무난하게 잘 써 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윈도우 10의 시대에서까지도 최소한의 거뜬함을 과시한다고 한들 만인에게 평등한 세월의 무게만큼은 이 노트북도 역시 이기지 못했다.

 

GPU가 섬뜩한 화면을 내뿜으며 뻗어버린 모습

배터리는 방전되어 제 기능을 못 하게 된 지 오래고, GPU는 가끔씩 위 사진과 같은 화면을 뿜어내며 뻗어버리기 일쑤였고, 2021년에 이르러서는 아슬아슬하게 돌아갔던 우측 힌지마저 파손되어 덮개를 열고 닫을 때마다 너덜너덜한 행색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와아 종강이다~!!!"

서브 PC를 바꾸자는 생각은 대학 생활을 앞둔 시점이었던 2019년 연말부터 줄곧 해 왔었지만, 이때 당시에는 마땅히 선호하는 모델을 찾지 못했거나 찾았다고 해도 높은 가격이 발목을 잡는 등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아이쇼핑(eye-shopping)으로 간만 보는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이 시기의 나에게 그나마 서브 PC를 반드시 바꾸어야 할 동기 아닌 동기를 주었던 게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촉발시킨 비대면 온라인 수업 풍조였는데, 하필 또 여기서 어쩔 수 없이 굴리게 된 P560이 웹캠을 꼭 써야 했던 온라인 수업용으로는 의외로 괜찮게 활약을 해 준 바람에 '어 이거 조금 더 굴려도 되겠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결국 서브 PC를 교체하겠다는 계획은 언젠가 '나중에' 이행하기로 기약 없이 미루어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나중'은 정확히 지금, 2022년 12월에 찾아온다. 군 제대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나는 군 적금 덕분에 두둑하게 쌓인 목돈을 바탕으로 지갑 속에 유동성이 크게 흘러 넘치고 있는 상태다.

 

전역했다는 기쁨과 어우러진 이런 갑작스러운 풍요로움은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던 '서브 PC를 바꿔보자'는 생각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P560에서 곧 자신을 잇는 후임이 될 PC를 구매한 직후

2022년 12월 19일부로 새롭게 서브 PC의 자리에 오른 '서피스 프로 9'

이제는 고비용을 거뜬히 감당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선호했던 제품을 살 수 있게 된 천혜의 상황, 여기에서 내가 새로 장만한 서브 PC는 진성 MS빠답게 '서피스 프로 9'이 되겠다. 이번에 새로 산 서피스 프로 9에 대해서도 언박싱 순간부터 시작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이는 글을 따로 할애하여 나중에 차차 풀 것이다.

 

Microsoft 계정에 연동된 PC 목록에서 P560을 제거하는 모습

무려 3년에 가까운 시간을 끌다 드디어 해낸 서브 PC 교체, 그리고 이와 함께 이제는 더 이상 서브 PC라는 지위를 상실한 '전직(前職)' 신세가 되어버린 P560.

 

대통령은 임기 다 마치고 퇴임하면 그래도 전직이라고 좋은 예우를 받는데, IT 기기는 한계수명 다 채우고 퇴임하면 예우는 커녕 중고로 팔려 새 주인을 찾기라도 하면 양반인 신세라 조금 불쌍하다. 이렇다 보니까 고도화된 AI가 끝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이제 내게 필요가 없어진 건 사실인데 어떡하나, 결국 P560도 서브 PC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여느 비슷한 연식의 PC들과 함께 당근마켓행 전철에 오르게 된다.

 

윈도우 비스타 시디 키의 가치는 어디까지 추락했나...

당근마켓에서 P560과 비슷한 연식의 노트북들이 얼마 정도에 팔리는 지 찾아보니 대강 3~4만원 정도의 시세가 형성되어 있는 듯했다.

 

여러 매물을 둘러보며 시세를 파악하던 도중에 물품 사진으로 아예 윈도우 비스타의 제품 키가 포함된 OEM 스티커가 있는 부분을 아무런 후처리 없이 올려버린 판매자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수요도 적었고 이제는 지원도 종료된 OS라지만 판매자의 무념무상에서 비롯된 저의가 너무나도 과감해서 놀랐다.

 

참고로 윈도우 7부터의 제품 키는 절대 이렇게 가볍게 다루면 안 된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윈도우 10/11 정품 인증에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도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여하튼 평균 시세에 대한 파악을 끝낸 뒤 P560을 3만원 같지만 3만원이 아닌 3만원에 팔기로 결심하고 판매글을 작성했다.

 

사실 거침없이 무조건 4만원대를 제시하고 보던 다른 판매자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4만원을 부를 수 있었지만, 내 물건의 경우는 힌지 상태가 영 좋지 못한 편이었기 때문에 나도 이에 따라서 4만원을 부르는 건 조금 양심이 없는 것 같아 이를 감안하여 3만원, 아니 3만원 같은 2만 9천원으로 타협을 했다.

 

그런 뒤의 이야기는 판매글을 올린지 15시간 만에 순조롭게 팔렸다는 해피 엔딩이다.

 

의외로 중고 시장에서 2000년대 중후반에 걸친 연식을 가지고 있는 노트북의 수요가 꽤 있던 편이라 놀랐는데, 알고 보니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분들이 유튜브 시청이나 웹 서핑 용도로 쓸 기기가 필요했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니, 저가형 태블릿을 쓸 수도 있을텐데 굳이 구형 노트북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의외로 중장년층 중에서는 태블릿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를 다루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꽤 있다. 그래서 마우스랑 키보드를 통해 '그나마' 익숙한 패턴으로 쓸 수 있는 구형 노트북을 더 선호하시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동안 서브 PC라는 명분을 가지고 아낌없이 '노인 학대'를 당해왔던 P560을 이렇게 보내니 마음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새로운 주인 아래에서 좋은 여생을 보내길 바라는 것이 내가 이 '전직 서브 PC'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