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별난 물건 박물관〉이라는 전시회에서 '초소형 미니어처 TV'를 본 적이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디스플레이 장치에서 실제 VHF·UHF 전파를 수신하여 SBS 방송 화면을 보여주던 모습은 당시 내게 큰 충격을 줬었는데, 이 순간은 여러모로 내 인생에서 '방송덕후'로서의 나를 있게 만들었던 큰 사건이었다.
한편 이러한 충격을 겪은 직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서 깊숙이 품어왔던 로망은 'DMB가 아닌 실제 TV 방송용 전파를 수신하는 휴대용 TV를 보유하는 것'이었다. 나의 이러한 로망은 세월이 흘러 스마트폰을 손에 항시 쥐고 다니는 시대를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을 마주해 왔던 탓에 이러한 로망을 선뜻 실현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던 게 현실이다.
2012년 말에 아날로그 TV 방송이 종료되면서 TV 수신 환경이 더욱 까다로워졌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을 통한 TV 방송 시청이 주류가 된 현재 시점에서 고전적인 휴대용 TV에 대한 수요가 크게 줄은 것도 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의지를 흔들었던 사유는 상기한 환경 변화에 좌절하여 '지금 와서 내가 이 물건을 고생해서 사 봤자 과연 쓸모가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에 가끔씩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로망을 둘러싼 마인드셋은 2023년 5월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는 내가 일전에 이름 모를 중국 도매업체 사이트에서 FM 트랜스미터를 직구했던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때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행했던 FM 트랜스미터 직구를 '성공적인 지름'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경험은 내게 또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었다. '진짜로 못 만드는 게 없는 사람들이 중국 업자들인데, 과연 더 찾아보면 ATSC 규격의 한국향 TV 전파를 받는 휴대용 디지털 TV까지 저렴하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생각은 당연히 적중했고, 곧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괜찮아 보이는 제품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LEADSTAR D5'라는 제품이었다.
또 믿음의(?) 이름 모를 중국 도매업체에서 생산한 듯한 이 제품은 심지어 아마존에서 'Portable ATSC TV'와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도 똑 닮은 외관에 다른 상표를 가진 제품들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OEM 생산까지 이루어지고 있을 정도로 꽤 성공한 제품인 듯 싶다.
그러나 아마존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OEM 제품을 구매하면 배송비를 포함하여 14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하지만,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원 제조자의 상표가 붙은 이 제품을 구매하면 반값 할인으로 무려 6만원에 살 수 있다. 심지어 무료배송으로.
이 제품은 수신 가능한 전파 규격별로 ATSC, DVB-T2, ISDB-T 등의 여러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구매자의 국적을 보고 알맞은 모델을 보내주는 듯했다. 상품 리뷰 란을 보면 ISDB 규격을 쓰는 브라질, DVB 규격을 쓰는 독일, 심지어 한국인 구매자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구매자들이 남긴 후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여러모로 이 제품이 가지는 범용성의 수준을 검증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해외발 TV로도 한국의 '지상파' TV 전파를 받을 수 있나?"
한국의 지상파 디지털 TV 방송 중 FHD 방송은 ATSC 표준 규격의 전파로 송출되기 때문에, 이를 지원하는 수신 장비라면 제조국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수신 및 시청이 가능하다. 다만 UHD 방송의 경우는 DRM 사양이 내장된 ATSC 3.0 변형 규격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ATSC 3.0 수신 장비로는 시청이 어렵다.
아무튼 지금까지 내 인생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던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는 이렇게 예상도 못 했던 시점에 갑자기 찾아오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걸 사봤자 몇 번 잠깐 쓰고 바로 창고행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만큼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오늘 여러 방송사 아침뉴스를 두드린 ‘경계경보’ 모먼트. pic.twitter.com/wuEETCczhM
— 블루스크린 (@BSofDe4th) May 31, 2023
그러나 마침 또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새벽에 느닷없이 경계경보가 울릴 정도로 비상 상황에 대한 경계심이 부쩍 커진 모양새인데, 이럴 때 딱 비상용 정보 획득 수단으로 휴대용 라디오랑 '휴대용 TV'를 갖추고 있다면 좋지 않을까?
사심 충족을 위한 지름이 아니라 비상 상황을 대비한 투자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나는 끝내 '결제'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게 되었다.
개봉
결제 후 2주 정도가 지나고 딱 알맞게도 종강날이었던 지난 금요일에 배송이 왔다. 제품 박스의 재질은 골판지 상자와 같은 그것으로 꽤 저렴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긴다.
박스 개봉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제품 본체. 외관이 상당히 투박한 편이지만, 이런 곳에서 제품을 살 때는 오히려 외관이 조금 투박해야 개인적으로 뭔가 안심(?)이 되는 그런 게 있다.
본체 이외의 구성품으로는 두 가지 타입(일체형, 별도 거치형)의 직접수신 안테나와 충전기, 그리고 사용 설명서가 있다.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어 버전의 매뉴얼과 함께 심지어 충전기까지 220V 규격으로 넣어 준 판매자의 세심함에 살짝 감동했다.
본체의 상단 측면에는 안테나 케이블을 꽂을 수 있는 단자가 돌출되어 있다. 이곳에 본체와 같이 동봉된 직접수신 안테나를 물리거나 외부 동축 케이블을 꽂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모듈식으로 구성해 놓은 점이 꽤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본체의 왼쪽 측면에는 전원 스위치와 핵심적인 입출력 단자들이 다 모여 있다. 외부 콘텐츠를 재생하는 데 사용되는 USB와 MicroSD 카드 슬롯, 3.5파이 이어폰 단자, 그리고 DC 12V 규격의 전원 단자가 있다.
본체의 정면을 마주봤을 때 오른쪽 끝에 조작부와 IR 센서, 전원 LED가 있다. 여기에 있는 7개의 버튼들은 위에서부터 볼륨 조절(▶️/◀️), 채널 변경(🔼/🔽), 입력 선택(INPUT), 메뉴 진입(MENU), 확인 동작(ENTER)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사용
OSD 언어로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를 고를 수 있었다. 솔직히 OSD의 다국어 대응까지는 별로 기대를 안 했던 영역이라 조금 의외였던 부분.
그런데 살짝 어이가 없었던 부분은 설정할 수 있는 시간대의 범위가 '미국 내에서 쓰이는' 시간대로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EPG 기능을 사용할 때 시간대가 맞지 않아 약간의 애로사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미국 내수용으로 기획했던 ATSC 모델에 한국어 데이터만 대충 씌워 나온 결과물이 이 제품인 듯한 모양새다.
동봉된 일체형 안테나를 장착한 모습. 안테나를 최대한 뽑으면 40~50cm 정도의 길이가 나온다.
자동채널 설정을 진행 중인 모습이다.
자동채널 설정을 진행하기 전에 OSD 상에서 '무선TV(지상파)'와 '유선TV(케이블)'로 구분되는 수신 모드를 선택하여 채널 검색 범위를 지정할 수 있다.
동봉된 일체형 안테나를 최대 길이로 뽑아서 사용 시 실내에서도 창가와 가까운 곳에서는 원활한 수신 감도를 보여줬다. 참고로 이 제품에서 수신하는 TV 방송 전파는 DMB 전파가 아니라 일반 TV를 타깃으로 둔 순도 100% 지상파 TV용 전파다.
VHF 규격으로 나가는 DMB용 전파와 달리 일반 TV용 전파는 UHF 규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실내에서의 수신 감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별도의 공시청용 설비 없이 일체형 안테나로만 TV를 시청하고자 한다면 실내보다는 실외에서 고정된 위치에 본체를 두고 쓰는 상황에 더 알맞을 듯.
감명도삼삼 수신양호합니다 pic.twitter.com/PwMr4e2HgW
— 블루스크린 (@BSofDe4th) June 16, 2023
위 트윗에 첨부한 영상은 자동채널 설정을 완료한 뒤 여러 채널을 돌려가며 수신 상태를 확인하는 영상이다.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수신 가능한 지상파 TV 채널 6개가 모두 잘 잡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명색은 ATSC 규격의 휴대용 '디지털' TV이지만, 하위 호환으로 아날로그 TV 방송의 수신까지 지원한다. 이때 받아들이는 전파의 규격은 당연히 NTSC. 물론 한국에서는 순수 지상파로 아날로그 TV 방송을 수신할 수 없게 된 지 이제 벌써 11년이 지났기 때문에 하위 호환용 이외의 별다른 의미가 없긴 하다.
또한 이 제품은 TV뿐만 아니라 FM 라디오 수신 기능까지 내장하고 있다. 다만 TV와 달리 라디오의 수신 성능은 썩 그렇게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편이라, 그냥 TV와 함께 겸사겸사 서비스용으로 끼워진 기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 제품의 특이한 점은 아무리 5인치 크기의 디스플레이를 가진 아담한 장비라고 해도, 엄연히 'TV'의 성격을 가진 장비라고 리모컨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리모컨을 사용하면 채널별 EPG 열람이나 비밀번호 설정과 같은 부가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본체의 조작부에만 의지할 경우 정상적으로 쓰기 어려운 기능.
이 제품은 의외로 PMP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PMP를 잘 모르는 세대를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USB나 MicroSD 카드와 같은 외부 저장장치에 있는 미디어를 재생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H.264로 인코딩된 1080p MP4 파일을 재생 중인 모습.
알리익스프레스 상품 소개 페이지에 나와 있던 정보에 따르면 MKV, MOV, AVI, WMV, MP4, FLV 등의 다양한 형식을 지원하는 것 같지만, 프레임레이트는 30까지만 지원하나 본지 1080p60 화질의 영상을 재생하려고 하면 '미지원 파일'이라는 오류가 뜬다.
미적으로는 투박해 보일지 몰라도 의외로 빌트인 킥스탠드까지 있을 정도로 실속성 면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디자인인 것 같다. 다만 킥스탠드 자체의 내구성이 조금 약해 보이는 편이라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는 않을 듯.
4.7인치 디스플레이를 가지고 있는 아이폰 6s와 화면 크기를 비교한 모습이다. 이 제품의 본체 부피는 전체적으로 요즘 주로 팔리는 스마트폰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총평
1. 의외로 일체형 안테나를 통한 TV 수신 성능이 준수했던 덕택에, 타지에 나갈 때마다 지상파 TV 방송 환경을 모니터링하면서 방송덕후 활동을 펼쳐 나가기에 딱 알맞은 제품이라고 느낀다.
2. 배터리 타임은 TV를 시청할 때 기준으로 2시간 정도 가는 듯. 내장된 배터리 용량이 1,500mAh 정도로 조금 부족한 편이라, 장시간 시청 시에는 수신 감도가 조금 낮아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전원 케이블을 꼭 물려야 하겠다.
3. 발열 관리가 조금 미흡한 편이라 몇 분 잠깐 사용해도 본체가 금새 뜨거워진다. 손에 들고 다니면서 보는 것보다는 어딘가에 거치해 두고 보는 편을 더 권장한다.
4. 앞서 TV 수신 모드를 '무선TV(지상파)'와 '유선TV(케이블)' 중에 선택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제품이 본래 미국 내수용으로 고안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는 8VSB와 QAM 중에서 어떤 형식의 방송 신호를 받아들일 지 선택하는 사양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품을 케이블 TV 회선에 물리고 '유선TV' 모드로 설정한 후 채널 검색을 하면 QAM 신호로 제공되는 여타 케이블 채널과 다르게 오로지 8VSB 신호로만 제공되는 지상파 채널이 검색되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제품을 케이블 TV 회선과 같이 활용할 계획이 있다면 반드시 이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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